장했다. 당시 고 李相伯박사의 아이디어로 단군강임의 전설이 깃든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한 성화가 대회장까지 봉송하게 되었다.
50년대의 전북체육은 스포츠 보급이 둔화된 상태로 6위, 7위 성적에 만족해야만 했다.
대회가 5년만에 서울에서 열린 1966년 제47회 대회는 참가선수 13,000명으로 1956년 제37회 서울대회때의
6,000명 보다 무려 2배 이상이 되었다.
66년 대회에 처음으로 대회 표어 “새 희망, 알차게, 보다 힘차게”를 제정하였으며, 대회가 거듭될 때마다 표어가
새로 제정되더니(48회 : 푸른마음 힘차게 내일을 위해, 49회 : 힘차게 슬기롭게, 알차고, 명랑하게, 50회 :
슬기롭고 아름답게, 보다 힘차게), 51회 대회(70년)에서 채택한 “굳센체력, 알찬단결, 빛나는 전진”이 그후 계속
사용되고 있다.
1967년의 제48회 대회에서는 카드섹션이 등장하였다. 흔히 인간 모자이크 또는 스탠드 마스게임이라 하는 카드섹션은
그 전년의 제5회 방콕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도입한 것이다. 이듬해인 제49회 대회부터는 입장상제도가 실시 되어, 개회식의
질서와 행동미는 놀랍도록 향상되었고, 개회식에서의 대통령이 직접 1위 선수단장에게 수여하는 입장상의 매력은 경기 성적
못지않은 또 하나의 과열경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56회(75년) 대구대회 이후 계속 지방에서만 대회가 개최되는 동안에, 이 입장상은 개최 시·도선수단에만 돌아가는
묘한 전통이 생기고부터는 경쟁열이 식는 듯한 경향이 있다가 제61회 대회부터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하나의 유산으로 남은 문제점이 있다면 씩씩한 기상을 표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굳어져 어색해
보이기조차 하는 행동보법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제5공화국의 출범 이후 뚜렷이 부각되어 자연스러운 보법으로
전환이 실현되어 지난 64회 대회부터는 전국체육대회에서 비로소 자연스러운 행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69년의 제50회 대회는 대회 반세기를 기념하여 ①성화의 전국일주 ②카드섹션의 동화 등장 ③이북 5도 임원단의
입장식 참가 등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가하였다. 그리고 이무렵에 선수단의 입장때 출신도의 선전효과를 노린 갖가지 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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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동작 등이 크게 유행되었으나, 성화 전국일주는 경비관계로, 선전동작은
미관상의 이유로 53회 대회부터 중지되었다. 1970년 태릉 국제수영장의 개장과 함께 51회 대회부터 하계대회(수영,
조정)를 추계대회로 통합하고 1972년의 제53회 서울대회때 초등학교부와 중학교부가 따로 떨어져서 전국 소년 체육대회를
별도로 개최하게 되었다.
분리되기 직전인 제52회 대회에 이르러서는 27개 종목에 16,000명이 넘는 임원·선수가 참가하는 비대화 현상이 나타나
대회 운영면에 불편할 뿐 아니라 체육대회의 지방개최 길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어 왔던 것이다.
1972년 53회 대회부터 12,000명대로 축소되어 단촐한 모습으로 등장한 전국체육대회는 각 지방에서의 유치신청이 잇따라
즐거운 비명을 올렸다. 54회 이후 61회까지는 단 한번만 서울에서 개최되었을 뿐 나머지 대회는 모두는 지방순회해 균형적인
체육 발전을 꾀하고, 지역간의 화합은 물론 체육 대중화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86아시아 경기대회와 88서울 올림픽을 유치하여 한국체육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고, 스포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조성하였다. 86, 88 양대회는 우리민족 반만년 역사에 유래없는 대 역사로 1920년부터 꾸준히 개최되어온 전국체육대회가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국은 86아시아 대회에서 종합 2위, 88서울 올림픽에서는 종합 4위를 차지하여 경기면에서도 체육선진국에 진입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전국체육대회를 통해 꾸준히 우수한 선수들을 발굴하였고 경기력을 연마한 결과의 소산이며 국민의 체육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80년대 말미인 1989년은 전국체육대회가 고희를 맞는 해였다. 대한체육회는 올림픽의 열기를 전 세계에 퍼져있는 교포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한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고희를 자축하기 위해 세계 한민족체육대회를 창설, 전국체육대회와 병행 개최하였다.
제70회 체전은 교포들에게 한민족의 발전상과 조국의 관심을 확인시켜 민족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고취시킨 대회로 기록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전은 드디어 22,000명을 넘어 섰고, 대회가 거듭 될 수록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