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회 전국체육대회..[77]
17. 제 42회 전국체육대회
1961. 10. 11 - 10. 15 (서울특별시) 24종목

전북, 76점 … 종합 7위

임원 : 144명, 선수 : 495명 계 : 639명
  5·16혁명이후 처음으로 개막된 제4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전북은 종합순위 7위를 기록하여 제41회 6위보다 한 등급낮은 성과를 거두었다.
  61년 10월 11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성동원두에 자리잡은 서울운동장과 각 보조경기장에서 거행된 이 대회에 전북팀은 임원선수 6백여명(선수4백 96명)이 출전하였으며 참가종목은 24개 종목중 17개종목이었다.
  42회 체전 입장식에는 윤보선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가 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소장, 송요찬 내각수반 등 3부 요인이 참석하였고, 재일교포를 비롯하여 11개시도 대표 7천여명이 참가하였으며, 전북팀은 제주, 강원, 경기, 재일동포, 경남, 경북, 전남팀 다음으로 8번째 입장하였다.
  군사혁명직후라 입장식도 어느대회때보다 질서가 강조되었고, 마스게임 등 식전행사도 화려하고 대규모였다. 금란여중, 용산고교, 경희대 학생들의 마스게임에 이어, 서울특별시, 상업은행, 대한상공회의소, 경성방직, 대한중공업, 동양방직 등 서울시내 굴지의 기업체 임직원들이 참가한 재건체조가 전개되었다.
  이 재건체조의 시범은 재건 국민운동 본부에서 심사하였고, 과거의 대회에서는 볼수 없었던 행사였다.
  5·16군사혁명 직후라 선수선서를 맡은 김상국은 “혁명정신을 받들어 운동 정신을 발휘하겠다”고 선서하여 군사혁명 주체들이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었는가를 엿볼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전북은 종합 76점을 얻어 7위에 머물렀는데 각시도 순위는 서울(184점), 경남(135.5점), 전남(120.5점), 경북(103.5점), 경기(96.5점), 충남(86.7점), 전북(76점), 충북(61.5점), 강원(46.5점), 제일교포(17점), 제주(10점)의 순위였다.
  전북팀의 순위가 이처럼 뒤진 원인은 (1) 24개 종목중 7개종목이 참가하지 못하여 불참 종목에서는 참가점수 마저 얻지 못하였으며, (2) 참가종목에 있어서도 기량이 크게 부족하였으
 

며, (3) 연습부족과 투지력이 허약했고, (4) 각팀의 감독, 코치 등 지도자들이 경기진행중 짜증과 호통 성화를 부려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린점을 열거할 수 있었다.
 출전에 앞서 각 팀의 감독, 코치는 평소에 연습을 많이 쌓아 어떤 대회 어떤 시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 할 수 있는 선수지도가 요청되기도 하였다. 이대회에서 전국 정상을 차지한 종목은 육상부 서영주가 넓이 뛰기서 1위, 강용득이 2위를, 박학규가 높이뛰기 1위, 서영주가 2위, 1600m계주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검도의 전주서중은 이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전국체전 4연패를 수립하였고 핸드볼의 김제여중이 우승하여 참가선수들을 고무시켰고 역도의 플라이급 곽영기, 반탐급 양무신이 각각 1위를 기록하였다.
  복싱에서 플라이급 정대성, 패터급 배용문, 라이트급 이홍대, 라이트웰터급 박구일이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맨발의 스타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화호여중의 배구가 준결승에서 부산여중의 복병을 만나 고배를 든 것은 큰 아쉬움이었다. 또한 전국 최강을 자랑하던 전북궁도가 결승전에서 전남에게 우승을 빼앗긴 것도 안타까운 일이었고 고창중 축구팀의 탈락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제42회 체전에 참가한 각팀의 전적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육상 전술한 바와 같이 서영주, 강용득, 박학규의 선전과 1천 600m계주의 우승은 전북육상사상 기록할 만한 수확이었다.
그러나 여자종목은 전멸하고 말았으며 기대했던 송삼섭의 마라톤은 서울운동장에서 출발 한강까지 3위로 달렸으나 역부족으로 도중하차하여 육상의 종합순위는 7위였다.
  ○야구 일반부와 전주고팀이 출전하였으나 아무런 이유없이 기권해 버려 전북출전명단과 중앙임원들의 성화가 대단하여 전북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축구 일반부의 전주축구단이 1회전에서 충남대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