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동경 아시아경기대회..[1094]
제3회 동경 아시아 대회
1958. 5. 24 ~ 6. 1 일본 동경

  제3회 대회는 54년 4월 30일 마닐라에서 개최된 AGF평의원회의에서 도쿄로 정식 결정되었다. 이에 앞선 52년 7월 24일 헬싱키에서 개최된 AGF총회에서 일본 개최가 정식으로 결정되자,   그 시점까지 대회의 유치에 나섰던 고베(神戶), 나고야(名古屋), 오사카(大阪)등 각 도시를 물리치고 도쿄가 택일된 것인데 이는 도쿄가 60년 올림픽 대회를 유치에도 나서고 있다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가국은 지난 대회의 18개국에서 제1회 대회 이래 이란, 네팔이 첨가되어 20개국이 되고 실시경기도 13개 종목이 되었으며, 시범경기로 유도, 배드민턴이 실시되었다. 이렇게 제3회가 되면서 아시아대회는 규모가 격상된 것이며, 한국스포츠의 참가도 본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임원, 선수 1백19명이 참가하여 20개 출전국 중 금 8, 은 7, 동 12개로 다시 종합 3위에 입상했다.
  한국은 금 38개인 일본에 이어 2위 필리핀과 금메달은 8개로 같았으나 은메달에서 7대 19로 열세였기 때문에 아깝게 3위에 머물렀다.
  특히 한국은 이 대회서 가장 관심을 끈 마라톤에서 李昌薰이 2시간32분55초로 당당히 우승하여 마라톤 강국의 면모를 떨침은 물론 60만 재일교포에게 뿌듯한 감격을 안기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밖에 육상은 넓이뛰기에서 徐永珠가 아시아 타이기록인 7m54로 금메달을 따냈으며, 5천m에선 한승철이 14분41초8로 한국 기록에도 못미쳤으나 은메달을 획득했고, 심상옥은 8백, 1천5백m에서 1분52초3과 3분59초 1로 각각 동메달을 따내는등 메달박스로 계속 각광을 받았다.
  한편 사이클에서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켜 153Km 도로경기에서 李洪馥, 魯道天, 金好順이 1, 2, 3위로 골인, 단체전까지 휩쓸었으며, 역도 플라이급의 李長優, 페더급의 李宅榮, 복싱의 라이트급 鄭東薰, 웰터급 金基洙도 금메달을 따내 투기 경기를 빛냈다.
  구기에서도 축구, 9인제 배구, 탁구 여자단체는 각각 은메달을 획득, 점차 한국 메달 판도를 넓혀 나갔다.
전북 출신은 육상 코치에 崔武起, 선수에 徐永珠가 참가하였고, 축구 선수에 金洪福이 출전했다.
  서영주는 멀리뛰기에서 7m54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김홍복이 출전한 축구는 중국에 이어 준우승을 하였다.

  인 姜俊鎬 선수는 1회전에서 어이없이 탈락하여 희비가 엇갈렸다.
  제5회 월드컵축구 본선진출이 확정되어 우승후보로 지목된 한국 축구팀은 홍콩과의 첫 경기에서 3대3 무승부를 기록, 기대했던 이들을 실망시키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8대2로 대파하고 미얀마와는 2대2로 비겨 추첨승으로 간신히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자유중국에 5대2로 패해 은메달에 머물렀다.
  레슬링경기에서는 밴텀급의 韓德興 선수가 은메달을 획득했고, 페더급의 金永俊 선수와 웰터급의 林培榮 선수가 각각 동메달을 차지했다.
  농구경기(남자)에서 한국팀은 약체 캄보디아를 89대48로 제압한데 이어 3일째에는 싱가포르를 69대48로 제압하여 2연승을 거두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다음날 주최국인 강호 필리핀과 맞붙은 한국은 45대84의 스코어로 현격한 실력차를 드러내면서 대패한데 이어 결승리그에 올라가서도 중화민국에 53대56, 필리핀에 52대76, 그리고 일본과의 대결에서는 47대58로 패해 필리핀, 중화민국에 이어 4위에 그쳤다. 전북출신은 연구조사원으로 이리농림을 졸업한 朴禧鏞, 축구에 鄭南湜가 출전하여 은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의 입상성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