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시아경기대회..[1083]

  아시안게임 출전사상 자카르타에서 유일하게 ‘노 금메달’의 아쉬움을 남겼던 전북체육은 66년 장소를 방콕으로 옮겨 금행진을 이어갔다.
  방콕대회 출전선수는 吉正燮, 李惠子(이상 육상), 金義坤, 姜英信(이상 배드민턴), 徐祥榮, 朴龜一, 李洪萬(이상 복싱), 李春日, 柳春子, 金永南(배구), 朴鍾福(테니스).
  이 대회서 전북은 군산복싱의 간판 朴龜一과 李洪萬이 정상에 등극, 8년만에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1970년 제6회 방콕대회는 차기대회 노다지 발견을 알리는 신호탄. 이 대회를 끝으로 전북체육은 다음 대회부터 메달을 대량 획득, 본격적으로 국제화 시대를 열게 된다.
  1970년 6회 대회 참가 선수는 姜英信(배드민턴), 崔在模, 崔吉洙, 崔相哲(이상 축구), 李庸寬, 金建奉, 金永南(배구), 金寧俊, 柳在權(이상 레슬링) 또 전북레슬링을 국내 무적으로 육성했던 安光烈이 레슬링 국제심판으로 참가했다.
  이 대회서 전북은 축구의 최재모와 최길수가 아시안게임 처녀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남자배구의 이용관, 김건봉, 김영남이 은메달을 캐내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당시 한국체육의 최고 인기종목이었던 축구의 우승은 감격적인 것이었다.
  전북체육은 6회 대회를 끝으로 74년 제7회 테헤란대회부터 황금시대를 개막했다. 참가선수 규모가 대규모로 확대됐고 참가종목이 다양화 됐다. 특히 전통의 복싱에 이어 사격, 테니스, 레슬링이 국내무대 정상을 차지한 후 무대를 아시안게임으로 옮겨 노다지를 캐냈다.
  테헤란 대회에 출전한 전북선수는 金香祚, 劉鍾萬, 張永吉, 權이운, 崔在模, 金菊鉉, 朴鍾吉, 李承均, 李德姬, 李順五, 李庸寬, 金建奉, 金益鍾, 金寧俊, 白承鉉, 安漢泳, 裵基烈, 姜龍植등 18명과 테니스 여자 코치 張英輔.
  전북은 이 대회에서 금 3, 은 7, 동 1개를 캐내 역대 대회에서 따낸 메달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수확을 거뒀다.
이 때 금맥광부들이 복싱의 劉鍾萬, 여자테니스의 李德姬, 李順五, 사격의 李承均.
  남성고 출신 유종만은 전북복싱의 중심축을 군산의 김완수 문하에서 이리의 조석인 문하로 옮겨 놓은 천재 사우스포였다.
  유종만은 그러나 테헤란 금메달 획득후 타시도 국가대표들이 휴식을 취하는 도중 주먹부상에도 불구하고 전북의 명예를 위해 전국체전에 출전, 부상이 심화됨으로서 선수생활에 큰 지장을 받는 비운을 격었다.
  은메달로 전북의 기백을 떨친 선수들은 펜싱의 金菊鉉, 배구의 李용관, 레슬링의 백승현, 안한영, 배기열, 강용식 등 安光烈사단의 전북레슬링은 60년대 말부터 국내에서 무적을 자랑했다.
  테헤란 출전선수들을 중심으로 무적군단을 이룬 전북레슬링은 이후에도 걸출한 신인들을 간단없이 배출하여 백년왕국을 이뤘으며 이때의 선수들이 현재 한국레슬링 지도계와 심판계를 독점하여 세계레슬링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전북은 이 밖에 테헤란서 사격의 朴鍾吉이 동메달을 따내는등 눈부신 약진에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