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시아경기대회..[1082]

2. 아시아 경기 대회
  아시아인의 영원한 전진과 우의를 다짐하는 대축제.
  전북체육은 아시아의 이상을 추구하는 아시안게임서도 찬란하게 빛났다. 전북체육이 아시아의 별자리에서 찬연한 빛을 발현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
  한국체육의 뒷전에서 인내를 거듭하며 도약을 꿈꾸던 전북체육은 70년대들어 침체기를 끝내고 한국체육의 앞열에 나서 아시아 무대를 석권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북체육은 80년대 대폭발을 통해 한국체육의 중심을 차지한 후 아시안게임을 발판으로 올림픽을 향해 비상했다.
  아시아 체육의 신기원을 연 아시안게임이 창설된 것은 50년.
식민지에서 신음하던 아시아 각국들이 속속 독립을 쟁취하자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고 번영을 다짐하며 대회를 창설, 인도에서 첫 대회를 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원년대회를 불참했던 한국은 54년 마닐라에서 열렸던 2회때부터 합류, 비로소 아시아의 강자로서 면모를 보여줄 수 있었다.
  금 7, 은 5개를 획득한 이 대회에 전북은 朴禧鏞이 연구조사원으로, 축구에 鄭南湜이 참가, 전북인으로는 최초로 아시아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당시 전북체육은 한국체육의 변방에서 숨죽이며 성장을 모색하던 시기. 축구의 鄭南湜은 준우승을 하였다.
4년뒤인 58년 동경 아시안게임을 빛낸 전북체육인이 崔武起(육상코치), 徐永珠(멀리뛰기), 金洪福(축구선수).
  선수로서 첫 출전한 이 대회서 전북은 서영주가 금, 김홍복이 은메달을 따내 신기원을 열었다.
  50년대 후반은 전북체육이 육상과 축구에서 전성기를 열었던 시기였다.
  육상에서는 徐永珠가 단거리 및 멀리뛰기 정상을 지키며 마라톤의 洪鍾五, 宋三燮등과 함께 ‘육상전북’의 아성을 굳게 지켰다.
  徐永珠는 아시안게임(58년, 62년)과 올림픽(56년, 60년)에 각각 2회, 金洪福은 아시안게임 2회(58년, 62년)에 이어 64년 동경 올림픽에 출전함으로써 전북육상과 축구 명성의 진원지가 되었다.
  전북체육은 1962년 제4회 자카르타대회에서 徐永珠와 金洪福이 2회 연속 출전, 李春日, 崔明子, 李英子, 柳春子(여자배구)가 여자선수로서는 첫 출전의 영광을 누렸다. 이 대회에서 김홍복은 축구 주전 수비로 활약, 2회 연속 은메달의 기쁨을 맛봤다.
  전북스포츠 사상 여자선수로는 아시안게임 무대를 처음 밟은 李春日과 崔明子, 柳春子, 李英子는 ‘맨발의 상승팀’이라는 애칭을 받으며 전국 여중배구를 강타했던 정읍 화호여중 신화의 주역.
  59년 종별선수권서 화호여중을 정상에 등극시켰던 그들은 군산여상을 거쳐 전북배구 선수중 최초로 태극마크를 달았으며 李春日은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출전후 64년 동경서 전북여자선수중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는 영예를 누렸다.

 

 
 
제8회 방콕아시아대회
한국선수단 입장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