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1053]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1976. 7 17 ~ 7. 31 캐나다 몬트리올

  몬트리올 올림픽에는 모두 72명(임원 22, 선수 50)이 참가했다. 종목은 레슬링, 유도, 남녀배구, 복싱, 사격 등 5개였다.
  모두 입상이 가능한 종목이었으나 사격은 다음해 서울에서 벌어질 세계선수권대회의 주최국으로서 체면을 고려하여 뮌헨때와 마찬가지로 정책적으로 파견됐다.
  1976년 7월 3일 오전 10시 시민회관 별관에서 거행된 결단식에서 金澤壽회장은 崔載九단장에게 단기를 넘겨주며 선전을 당부했다. 김회장은 “뮌헨대회때는 체육회장을 맡은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라 책임감도 덜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어떻게든지 좋은 성적을 내야할텐데 걱정이다”고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올림픽 개막은 7월 17일이었으나 선수단은 7일 현지로 떠났다.
한국 선수단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짜릿한 역전극을 펼쳤다.   올림픽이 개막된지 열흘이 지나도록 단 한 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해 “노메달로 끝나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감마저 감돌 때 비로소 메달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28일에는 유도에서 미들급의 朴英哲이 동메달을 따낸 것을 시발로 30일에는 라이트급의 張銀景이 은메달을 따냈고 여자배구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여자배구의 동메달은 한국의 올림픽 구기사상 첫 메달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러한 성적을 올리게 되기까지는 그만한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최종일인 31일에는 레슬링에서 자유형 플라이급의 全海燮이 동메달을 따냈고 이어 자유형 페더급 梁正模가 대망의 금메달을 따냈다.
  梁正模는 이날 폴이나 폴에 가까운 큰 점수차의 판정패만 당하지 않으면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절대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 상태에서 결승에 올랐다. 상대선수는 강적인 몽고의 「오이도프」였다.
  결승에서 梁은 10대8로 판정패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무벌점이었던 梁은 판정패로 3벌점을 안은 반면 「오이도프」는 근소한 차로 이겼기 때문에 벌점 1점이 추가되고 4벌점이 되는 바람에 은메달로 만족해야 했다.
  모두 6개의 메달(금 1, 은 1, 동 4)을 따낸 한국선수단은 메달집계 19위를 차지하여 금 1, 은 1개의 북한(메달집계 21위)을 앞섰다. 뮌헨에서의 열세를 만회한 것이다. 북한은 복싱에서 구용조(밴텀급)가 금, 이병욱(라이트플라이급)이 은을 따냈다.
  몬트리올 올림픽은 동독이 세계스포츠의 양대 산맥인 미국과 소련의 아성을 깨뜨리고 새로운 강국으로 데뷔한 무대였다.
  소련이 금메달 47개로 1위였으며 금 40개의 동독은 금 34개의 미국을 제치고 사상 최초로 2위에 올랐다.
  여자체조 10점만점의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뜻에서 일어난 아프리카 26개국의 집단 보이콧트, 대만의 축출등이 모두 이번 대회에서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