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뮌헨 올림픽 대회
1972. 8. 26 ~ 9. 11 서독 뮌헨 뮌헨 올림픽대회의
개최가 정식으로 결정된 것은 1966년 4월 26일 로마에서 열린 제64차 IOC 총회에서였다.
뮌헨시에서 대회를 유치하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된 것은 이 시 출신으로서 과거의 유명한 육상경기선수였던
‘한스 브라운’(1886 ∼ 1918)이었다고 한다. 그는 중거리선수로서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2개의 동메달,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는 400m에서 은메달을 따낸 바 있다.
‘브라운’은 초기의 독일 육상경기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에서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상으로 그가 스스로의 성공을 항상 자신의 고향 뮌헨을 위해 추구해 왔다. 말하자면 그의 향토애가 뮌헨시로
하여금 대회유치를 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뮌헨시가 낳은 유명한 스포츠 선수는 많은데 그중에서도 훗날 뮌헨 올림픽당시의
IOC 위원장인 ‘브런더지’의 친구로서 육상경기선수인‘릿터 폰 할트’(1881 ∼ 1964) 등도 개최지 결정에 이를
때까지 음성적 많은 힘이 되었다고 한다.
뮌헨대회는 출전에 앞서 선수단 구성 때부터 여러 가지 잡음이 있었다. 선수단은 소수정예주의 원칙에
따라 선발됐으나 뒤에 변칙적인 방법으로 추가된 선수들이 있었다.
선수단은 당초 과거 동경과 멕시코 두 대회성적을 기준으로 6위 이내 입상이 가능할
것으로 인정되는 종목 및 선수를 엄선키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확정된 선수단 규모는 여자배구,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등 5개 종목에 걸쳐 39명(임원 13, 선수 26)이었는데 이는 52년 헬싱키대회(43명)때 보다도
4명이나 적은 역대 대회 가운데서 최소 규모였다. 그러나 7월말 프랑스 생디에에서 벌어진 올림픽 배구예선에서 북한을
격파하고 출전권을 따낸 남자배구팀(임원 2, 선수 12), 현지에서 훈련중이던 육상의 朴常守(높이뛰기), 白玉子(포환던지기),
수영의 趙五連과 사격선수단(임원 1, 선수 5)이 현지에서 합류함으로써 선수단의 총 규모는 62명(임원 6, 선수
46)으로 늘어났다.
사격은 입상가능성이 희박한 종목이어서 처음에는 선발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으나 朴鍾圭 사격연맹회장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추가된 종목이었다.
金澤壽체육회장은 이 요청에 따라 사격선수단을 미리 서독으로 전지훈련을 보낸뒤 거기서 기록이 좋아지면
본선수단에 합류시킨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뮌헨올림픽은 또 북한이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북한은 10개 종목에 걸쳐 82명(임원 18, 선수 64)의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호칭은 DPRK였다.
이 호칭은 1969년 6월 7일 제68차 IOC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멕시코올림픽 개막을 앞둔 1968년 10월 8일 제67차 IOC 총회는 멕시코올림픽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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