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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찾지 못해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IOC는 1963년 8월 남북한 별개의 팀으로 동경올림픽에 참가하도록 결정함으로써 결국
북한이 올림픽 무대에 첫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동경올림픽을 5일 앞둔 1964년 10월 5일 북한선수단 1진이 니이가따(新渴)항에 도착했으나 곧
10월 8일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이 올림픽 보이곳트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자신들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신 북한(North
Korea)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 출전한 장창선은 승승장구 은메달을 확보하고 결승전에서 일본의 요시다와 맞붙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요시다’는 장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기만 하였다. 성급하게 덤비던 장은 너무 공세만을 취하다 허점을 노출하고
불의의 반격을 당해 2점을 잃고 말았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장은 결국 판정패, 은메달에 머물렀다. 장의 메달은 우리 선수단의
첫 메달이고 런던대회 이후 줄곧 올림픽에 도전해온 레슬링의 첫 경사였다. 중·경량급을 출전시킨 한국복싱은 경량급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플라이급의 조동기와 밴텀급의 정신조는 메달 유망주였다.
조동기는 1, 2회전에서의 쾌조의 컨디션으로 판정승을 거둬 메달권 진입을 눈앞에 두는 듯 했으나
준준결승에서 어처구니 없게도 실격패를 당하고 말았다. 판정에 당황한 한국응원단과 조는 항의를 제기하며 링을 점거함으로써
경기가 40분 동안 중단되는 사태를 빚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정신조는 승승장구, 일약 결승에 올라 일본의 ‘사꾸라이 다까오’와 맞붙게 되었으나 아깝게도
2라운드 1분10초만에 RSC로 패배함에 따라 은메달에 그쳐야만 했다.
또 유도 중량급에 출전한 재일동포선수 김의태는 준준결승까지 세경기를 내리 한판승으로 장식한 후 준결승에
올라 일본의 숙적 오까노(岡野)와 맞붙었으나 판정패, 동메달에 머물렀다. 이로서 한국 선수단은 이번 대회에서 모두 은
2, 동 1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선수단은 당초 참가 16개 종목에서 전부 좋은 성적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육상과 축구의
참패는 큰 충격이었다. 개인종목으로는 최대 인원(임원 3, 선수 16명)을 출전시킨 육상은 마라톤을 제외한 출전종목 전부에서
1명도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또 아시아 동부지구 대표로 두 번째 올림픽 무대에 나선 축구는 예선리그에서 6대1(대
체코), 4대0(대 브라질), 10대0(대 아랍공화국)이란 스코어로 참패하고 말았다.
한국은 일본, 미국, 소련,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5번째로 많은 선수단을 보냈지만 종합성적에선 겨우
27위에 그쳤다. 올림픽 기간중에 열린 제62차 IOC 총회는 ‘브런디지’위원장의 3선을 의결했고 아울러 이 총회에서
KOC 위원장 李相佰박사가 IOC 위원으로 선임됨으로써 한국은 사상 두 번째의 IOC 위원을 갖게 되었다.
전북에선 육상에 李惠子, 배구에 柳春子, 복싱에 朴龜一, 李洪萬, 축구에 김홍복,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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