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동경 올림픽 대회
1964. 10. 10 ~ 10. 24 일본 동경 1964년
3월 이상백위원장과 장기영부위원장 그리고 48명의 위원으로 재 조직된 KOC가 정식으로 출범을 하게되었다. 이 새
체제밑에서 구성된 동경올림픽 선수단은 사상 최대규모인 224명(선수 1백65명, 임원 59명)으로 되어 있었다.
출전 16개 종목은 예상 성적과 출전 목적에 따라 5개등급으로 나누어졌는데 입상 가능종목은 복싱,
레슬링, 유도, 역도 등 4개, 입선가능 종목은 마라톤 1개 종목에 불과했다. 나머지 참가종목은 예선통과종목(축구,
배구, 승마, 수영, 농구), 우수종목(사격, 사이클), 정책종목(체조, 육상, 펜싱, 조정, 근대5종)으로 구분됐다.
출전준비를 마친 우리 선수단이 9월 17일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결단식을 갖은뒤 적응훈련이 필요한
농구, 사격, 수영, 승마 등 4종목 선수 44명은 9월 18일 1진으로 출전했다. 본진 2진은 10월초로 출전예정일을
잡았다가 북한선수단이 일본에 조기 입국한다는 정보에 따라 부랴부랴 9월 23일 장도에 올랐다.
동경올림픽은 재일동포의 눈물어린 성원으로 인해 더욱 우리에게는 뜻 깊은 대회가 되었다. 오랫동안
남의 나라 일본에서 차별대우의 설움을 겪어온 재일동포들은 늠름한 모국선수단을 맞아 민족의 긍지와 함께 따뜻한 동포애를
한껏 느꼈던 것이다.
민단과 각종 한국인 단체가 중심이 된 ‘동경올림픽 후원회’(회장 李榕天)는 한국 선수들의 전지훈련에서부터
응원, 선전활동, 음식문제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계획을 세워 추진했다. 재일동포의 모금으로 마련된 9백만엔은 선수촌
체제비와 경기용구 구입, 선전 섭외비로 사용됐다. 이 액수는 당시 국내에서 마련한 참가예산이 2천7백82만엔 정도였음을
비춰 거금이었고 동경올림픽은 유럽과 미국이 독점해 온 올림픽 무대를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로 옮긴 뜻 깊은 대회였다.
유색인종 국가가 올림픽 주최국이 된 것도 처음이었다.
1940년 제12회 대회를 유치했다가 중·일전쟁으로 무산된 뒤 2차대전 패전국으로서 경제, 외교적으로
시련을 겪어온 일본은 한국전쟁의 특수경기에 힘입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는데 이제 이를 바탕으로 올림픽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남북한 문제는 헬싱키올림픽 이후 ‘두개의 중국’‘두개의 독일’과 함께 IOC의 두통거리였다.
IOC는 1957년 소피아 총회에서 북한의 NOC를 승인했으나 올림픽 출전은 KOC의 동의하에 단일팀으로 하도록 단서를
붙였었다.
그후 단일팀 구성을 위한 토의가 진행되지 못한채 로마올림픽엔 한국이 단독으로 출전했으나 1963년
1월 스위스 로잔에서 IOC의 중재에 의해 분단후 처음으로 단일팀 구성을 놓고 남북한이 직접 대화에 나서게 되었다.
로잔회담에서 남북한은 국가는‘아리랑’으로 하며 임원, 선수선발은 독일의 예를 따르기로 합의했으나
그후 5월과 7월 두차례에 걸친 홍콩회담에서는 더 이상의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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