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헬싱키 올림픽 대회
1952. 7. 19 ~ 8. 3 필란드 헬싱키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올림픽 출전여부를 놓고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불참을 지지하는 측은 자유우방의 용사들이 한국전선에 나와 피를 흘리고 있고 한국의 젊은이들도
일선에 나가 목숨을 버리고 있는 이 마당에 올림픽에 나가는 것은 국제적 신의로나 도덕적 입장에서 마땅치 않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 국민이 전쟁의 참화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또 체육을
통한 국제친선 외교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올림픽 출전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헬싱키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정식으로 참가초청장을 보내왔고, 52년 1월엔 브런디지 IOC위원장이 한국의 참가를
권유하는 서한을 보내옴에 따라 마침내 국회는 같은달 만장일치로 올림픽 파견 건의를 가결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최후로
참가결정을 내렸다.
총 43명으로 확정된 대표선수단은 육상, 역도, 복싱, 사이클, 레슬링, 승마 등 6개 종목에
출전했다. 한국선수단은 초반 육상, 레슬링, 사이클 등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온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마라톤의
실패는 큰 충격이었다.
한국의 마라톤은 베를린 올림픽, 보스턴 마라톤(1947년)을 제패한데 이어 1950년 4월엔
54회 보스턴 마라톤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 2, 3위를 휩쓰는 등 화려한 전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80여명의 건각들이 출전한 마라톤은 초반부터 체코의 인간기관차 자토펙과 영국의 희망 J.피터즈의 대결이었다. 崔崙七은
평소 기록보다 약간 여유있게 2진 그룹을 형성하며 역주했다. 35㎞지점을 5위로 통과한 최윤칠은 골인지점 1백m를
남기고 앞선 주자를 따라 잡아 4위로 골인했다. 기록은 2시간 26분 36초, 3위보다 28초 늦고 5위와는 5초,
6위와는 6초 차이의 대접전이었다. 6위까지의 기록이 모두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전북출신은 육상 마라톤에 홍종오가 참가하였으나 도중 기권했다.
한국선수단의 성적은 동메달 2개로 참가 69개국 가운데 37위를 하였다. 출전 경비 마련은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올림픽 후원회(회장 허정)가 중심이 돼 범 국민적인 기금운동이 펼쳐졌다. 모금은
기부금과 기념뱃지 판매로 실시됐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마크가 새겨진 뱃지는 금장이 10만원, 은장이 1만원이었다.
국회의원은 세비의 1할씩 내놓았고 각 공무원은 1급 10만원, 2급 1만원, 3급 1천원씩 각출했다. 국군도 모금에
적극 참여했는데 5사단 장병은 4백80만원을 거둬 후원회에 기탁했다. 특히 참전중인 미군 병사들도 모금운동에 나섰고
미8군 사령관인 ‘밴플리트’장군은 7천달러씩 두차례나 기부금을 내놓으며 올림픽 출전을 격려했다.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은 또 소련이 40년만에 처음으로 381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참가시킨 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이로서 미국의 독무대였던 올림픽은 미, 소의 첨예한 대립으로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