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런던올림픽..[1038]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
1948. 7. 29 ~ 8. 14 영국 런던

  태극기를 앞세우고 첫 출전한 제14회 런던올림픽은 한국스포츠사에 신기원이었고 올림픽사에서도 감회가 새로운 대회였다. 당초 12회 대회(1940년)는 일본 도오쿄에서, 13회 대회(1944년)는 영국 런던에서 열리기로 결정됐으나 1939년 9월 1일 발발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물거품이 된 바 있다. 따라서 런던올림픽은 꺼졌던 성화가 12년만에 다시 피어올라 인류의 제전이 부활되는 감격적인 무대였다. 총 67명으로 구성된 한국선수단은 서윤복 등 3명이 출전한 마라톤에 큰 기대를 걸었고, 다른 종목은 참가에만 의미를 부여한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섰다.
  농구는 첫날 벨기에를 맞아 29대27로 한골차의 승리를 거둔 뒤 분투 끝에 2승2패로 본선(8강전)에 오르는 전과를 거뒀다. 예선에서의 2패는 필리핀에 35대33, 자유중국에 49대48로 아깝게 무너진 것이었다. 한국팀은 본선에서 연패를 거듭 결국 8위에 만족해야 했다.
  레슬링은 첫날 황병관(웰터급), 김석영(라이트급)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고 한상용(밴텀급)이 불출전으로 2회전에 진출하는 등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2일째 경기에서는 4체급에서 모두 석패하고 말았다.
  런던올림픽이 개막된 1948년 7월 29일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으로 엄격히 말하면 한국선수단은 미군정하에서 출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한국 선수단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당당히 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36년 동안 맺혔던 恨과 신생국민의 의지가 모아진 결과였다. 그 혹독한 식민통치 아래서도 한국민의 기개는 면면히 이어져 이제 독립된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발돋움하게 됐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이같은 올림픽 첫 출전의 배경엔 당시의 가난한 경제형편 때문에 소요되는 경비조달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따라서 대회에 앞서 조직된 올림픽 후원회는 국민의 성금으로 경비를 마련하자는 운동을 벌여 ‘올림픽후원권’을 발행키로했다.
  1947년 12월부터 판매된 올림픽후원권은 1백여만장이 팔려 그 수익금으로 8만여 달러를 마련함으로서 올림픽 출전경비를 거의 충당할 수 있었다. 또 올림픽 선수들에 대한 직접적인 격려도 대단했다. 올림픽 장도를 사흘 앞둔 6월 18일 오후 서울운동장엔 선수단 결단식을 겸한 시민 환송식이 베풀어졌다. 그 자리엔 이승만 국회의장을 비롯 체육계, 미군정 간부들이 모두 참석했다.
  전북에선 농구에 吳壽喆, 육상에 洪鍾五(고대재), 축구에 鄭南湜씨가 참가했다.
  마라톤 25위 홍종오 27위 서윤복, 崔崙七선수는 도중 기권했다.
오수철이 출전한 농구

B조 예선

   한국 29 : 27 BEL    한국 33 : 35 필리핀

 

   한국 48 : 49 대만   한국 120 : 20 이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