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티 올림픽에 출전했다. 특히 이때 전북레슬링을
전국최강으로 육성한 安光烈이 대표팀 코치로 출전, 전북체육인중 국가대표 임원으로 올림픽 무대를 최초로 밟는 기록을
남겼다.
선수로는 徐祥榮(복싱), 梁武信(역도), 安川泳, 金益鍾(이상 레슬링) 등.
군산복싱의 대부 金完洙는 박구일에 이어 서상영을 연속 올림픽에 출전시킴으로써 성가를 높였다.
安川泳은 동생 安漢泳과 함께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막강 전북레슬링의 주축을 이룬 선수. 기량이 상승일로였던
그는 초반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도 붕대를 감고 출전했으나 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한 후 이듬해인 1969년
세계선수권서 그레꼬로만형 밴텀급 2위로 아쉬움을 달랬다.
동생 안한영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함으로써 올림픽 형제를 이룬 후 지금은 모두 한국레슬링의
중견지도자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전북체육은 이어 1972년 뮌헨서 유종만(복싱), 이용관(배구), 김영준·안천영(이상 레슬링)
등 4명의 올림픽 선수를 배출했다. 사우스포인 유종만은 남성고 재학때 이미 국가대표에 선발된 천재복서. 올림픽에서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나 이때를 전환점으로 전북복싱은 군산에서 이리의 조석인 문하에 물줄기의 중심을 차지했다.
한국체육은 76년 몬트리올서 마침내 양정모가 한국올림픽사 28년만에 마침내 올림픽의 성좌에 한국의
별을 아로새겼다.
전북은 이 대회에 金益鍾(레슬링 GR형 코치), 유재권·백승현·안한영(이상 레슬링), 이승균·박종길(이상
사격), 이용관(배구)이 출전했다.
출생후 곧바로 서울로 이주한 李承均(서울용호클럽)은 지금까지 사격스키트부문 도 대표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데 전국체전서 수 많은 메달을 고향 전북에 안겨줬다.
스포츠를 통한 인류의 화합과 공동 번영이라는 올림픽의 이념은 80년대들어 동서 냉전에 휘말려
완전히 퇴색됐다.
소련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자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미국의 주도로 서방측이 불참한 가운데
반쪽대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어 84년 LA올림픽은 보복에 나선 소련의 주도로 서방만의 잔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스포츠 강국인 동구가 불참한 사이를 틈타 한국은 LA올림픽서 금메달 6개를 따내는 빅뱅을
연출하며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 올림픽坐에 한국 별자리를 생성시켰다.
한국의 올림픽 별자리를 생성시킨 힘의 원천은 전북체육이었다.
LA올림픽에 출전한 전북선수는 곽정훈·박종길·박철승(이상 사격), 김영준·안한영·배기열(이상
레슬링코치), 유인탁·김태우(이상 레슬링), 김광선·신준섭(이상 복싱), 김관현(유도), 문숙(사이클), 이순이·정화순(이상
여자 핸드볼), 안진수·강태구(남자 핸드볼).
전북은 이중 복싱 미들급 신준섭,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의 유인탁이 금, 여자 핸드볼이 은메달을
따내 한국의 한자리수 성적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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