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는 감격을 누렸다.
올림픽 출전의 감회는 6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과 달랐다.
빈약한 국가재정으로 인해 아시안게임 및 세계선수권 등 올림픽을 제외한 모든 국제대회가 선수들의
자비출전이 원칙이었으며, 이 때문에 선수들이 소나 밭을 팔아 출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올림픽 역시 국비지원이었지만, 국고를 절약하기 위해 선수 정예부대를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때문에 올림픽에 출전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웠고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이같은 소수 정예의 원칙은 5·16후 3공화국이 탄생하면서 변화를 겪게 됐다.
국력과시 및 국민의 일체감 조성이라는 국가 체육개념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도입돼 올림픽 선수단도
대규모로 확대됐다. 특히 3공화국 발족직후 개최된 1964년 동경올림픽은 인접한 지리적 여건이 더해 대규모로 확대됐다.
이때부터 전북은 전국최강으로 도약한 레슬링과 복싱 등을 중심으로 한국선수단의 중심을 이루게 됐다.
1964년 동경올림픽 출전선수는 李惠子(여·투창), 朴龜一(복싱), 金洪福(축구), 梁武信(역도),
崔炳燮, 金益鍾, 申東義, 李奇烈(이상 레슬링), 李春日(여·배구) 등 9명.
이중 역도의 양무신은 56㎏급 5위로 당시까지 전북선수가 올림픽서 거둔 최고의 성적을 올려 범도민적
환영을 받았으며 서울체고 교사겸 대한역도연맹 전무이사로 한국역도의 살림을 꾸려가기도 했다. 또 이때부터 전북의 역도붐이
크게 일어 전북역도가 80년대 후반부터 전국최강의 위치를 차지하는 원인이 됐다.
축구의 金洪福은 全斗煥 전대통령과 대구공고 축구동기로 전주공고로 전학온 선수. 농구 전국가대표
명가드 김화순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李春日은 50년대 전국의 매스컴을 집중시킨 정읍‘화호여중 신화’의 주역으로 전북 배구사상 최초로
국가대표에 올랐다.
레슬링의 신동의, 최병섭, 이기열은 당시 전북대 씨름선수들로 전북 씨름을 전국 정상권으로 도약시킨
장사들.
동경올림픽을 겨냥, 레슬링으로 전향해 국가대표 중량급을 석권했다.
신동의는 63년 동경프레올림픽에서 4위까지 올랐으나 본무대에서는 별 성적을거두지 못하였으며,
주택공사 레슬링을 거쳐 도체육회 사무처장을 역임하며 전북체육의 실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최병섭과 이기열은 올림픽후 곧바로 씨름판에 복귀했으며, 이중 최병섭은 김제 씨름협회장을 역임하며
김제를 전북씨름의 요람으로 가꾸기도 했다.
진안출신 金益鍾은 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연속 출전한 후 국제 레슬링연맹 7인 위원겸 아시아연맹
심판위원장을 역임, 아시아 레슬링서 최고 영향력 있는 인사로 부각됐다.
전북체육은 68년도에 레슬링이 전국최강을 유지하며, 국가대표 주류를 이뤄 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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